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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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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사진(卒業寫眞)    
    서면초등학교 졸업사진 1929년 서면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기념사진이다. 현재 서면초등학교는 광명(光明)에서 가장 전통이 깊은 학교로 1927년 4월 1일 개교하였다. 당시 학생수는 1학년 32명, 여자는 없었고, 교사는 일본인 1명, 한국인 1명이었다. 초대교장은 기타야마(北山若二), 훈도(訓導)는 성만용(成萬鏞)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의 학생수는 남자 25명, 여자 2명으로 확인된다. 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이원익선생의 10대손 이연철(李淵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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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존도 영정(李存道 影幀)    
    이존도(李存道,1659-1745)는 이원익의 4대손으로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망와(忘窩)이다. 첫째 부인은 은진 송씨 도흥(道興)의 따님으로 송응개(宋應漑)의 후손이고, 둘째 부인은 안동 권씨 석(碩)의 따님이다. 진사(進士)에 입격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완성군(完成君)으로 군을 세습하였다. 장수[大?]하여 자헌ㆍ정헌대부 및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청산(靑山), 양성(陽城), 용궁(龍宮), 평창(平昌), 장성(長城) 등의 수령을 지냈다. 사후에 아들 완양군(完陽君) 이인복(李仁復)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이상(貳相: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원익의 유지(遺志)에 따라 이원익의 묘갈음기(墓碣陰記)를 지었고, <묘산기(墓山記)>를 속간하여 위전(位田)을 정하고, <파보(派譜)>를 만들었다. 저술로는 전사통감 60권과 망와만록 4권이 있으나, 전자는 일부만 남아있고 후자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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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상(祭床)    
    제상(祭 床) 나무에 옻칠한 것으로 촛대와 향로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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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익 영정(李元翼 影幀)    
    영정의 크기와 형용이 꼭 같은 소수서원 소장의 이원익 영정에는 「領議政 完平府院君 文忠公 梧里先生畵像 癸卯春移摹」라는 명문이 있어 오리선생이 별세한 후 소수서원에 모시기 위해 1663년(현종 4) 이모(移摹)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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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 이원익 영정(梧里 李元翼 影幀)    
    이원익이 58세가 되던 1604년(선조37),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신했던 공으로 호성공신에 녹훈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영정이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는 훈호(勳號)를 내려주고 이와 함께 녹훈교서(錄勳敎書)와 화상(畵像)을 하사하였는데, 현재 종가에는 호성공신 화상만이 전해지고 있다. '호성선무청난 공신도감의궤(扈聖宣武淸難 功臣都監儀軌)' 이원익이 58세가 되던 1604년(선조37),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신했던 공으로 호성공신에 녹훈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영정이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는 훈호(勳號)를 내려주고 이와 함께 녹훈교서(錄勳敎書)와 화상(畵像)을 하사하였는데, 현재 종가에는 호성공신 화상만이 전해지고 있다. '호성선무청난 공신도감의궤(扈聖宣武淸難 功臣都監儀軌)'에 따르면 당시 이원익은 1등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전형적인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17세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영정이며, 비슷한 시기의 공신도상에 비해 섬세한 묘사와 정확한 표현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에 따르면 당시 이원익은 1등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전형적인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17세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영정이며, 비슷한 시기의 공신도상에 비해 섬세한 묘사와 정확한 표현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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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결본 이원익 영정    
    이원익영정 영정은 훼손이 매우 심하여 얼굴과 가슴 부분만 약간 남아 있어 전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단 얼굴 부분의 수염이 검고 적으며 흉배에 학이 아닌 공작과 구름 사이로 모란꽃이 보이고 있어 당상관 이상의 벼슬일 때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명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도상 이전의 작품으로 유추해 볼 수 있으나, 호성공신도상 제작이전에는 초상화를 제작했을 만한 특정 동기가 없었다. 1593년(癸亥)에 崇政大夫 陳秦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으나 그때의 작품인지는 추측하기 어려운 미문의 연구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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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익 평양생사당 구장 영정(李元翼 平壤 生祠堂 舊...    
    평양의 서리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에 봉안되었던 영정이다. 영정의 제작시기와 연유는 그동안 알 수 없었으나 근래 영정에서 발견된 화기(畵記)와 이원익의 문집인 '오리집(梧里集)'의 내용을 통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영정에는 두 손을 소매에 넣는 공수자세를 취하는 것과 달리, 손을 드러내어 오른손에는 부채를 쥐고 왼손은 관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나 몸의 방향이 우안7분면(右顔七分面)인 점 등에서 이례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또한 길고 하얗게 표현한 손톱은 일반영정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것으로, 불화(佛畵)의 고승진영(高僧眞影)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평양의 승려 화가가 서리들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의 화원이 아닌 지방 화공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1978년 10월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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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품휘(唐詩品彙)    
    당시품휘(唐詩品彙) 명(明)의 고병(高棅, 1350∼1423)이 편찬한 당시선집(唐詩選集)이다. 송(宋)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 의 설(說)을 이어받아 성당시(盛唐詩)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또한 당시를 초(初)ㆍ성(盛)ㆍ중(中)ㆍ만(晩)의 4기로 구분하는 방법도 이 책에 의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당시(唐詩)를 공부하는데 널리 읽힌 책으로 본래 90권 1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본 박물관의 것은 일부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