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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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의 선택과 풍수설 비판

이원익은 1634년(인조 12)에 서거하기 전에 본래 자신이 정한 곳에 묻도록 자손에게 부탁하였다. 이때 이원익은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라 하고 유서(遺書)에 다음과 같이 당부 하였다.

풍수가(風水家)의 말은 망연하여 알기 어렵고 또 이론이 여러 가지이다. 길흉이 서로 달라서 더욱 믿을 수가 없다. 인생은 스스로 천수(天壽)가 있는 것인데, 그 길흉화복이 어찌 장지 때문에 바뀌겠는가! 내가 본 사례가 많고 내가 들은 지가 오래인지라 너희들은 절대로 풍수설에 현혹되지 말라! 다만 마땅히 한 산지에 같이 장사하여 한집의 골육으로 하여금 서로 소원하지 말 것이며 자손대대로 하여금 찾아보고 그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옳을 것이다.

이렇듯 이원익은 풍수지리설에 대하여 구애받지 않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기준 으로 묘소를 정하였다.

이원익 선생 묘소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85호), 소재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산 137-1번지
묘표의 건립과 석물 구성
  • 이원익묘표음기
  • 이원익묘소 문인석
이원익 사후 별다른 묘역정비 작업은 없었다. 그 후 100년 뒤인 1734년(영조 10) 4세손 이존도(李存道)에 의해 묘표와 관련 석물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묘표의 음기는 이존도가 짓고 글씨는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집자(集字)하여 새긴 것이다. 재질은 대리 석이며,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등의 석물이 함께 구비되어 있다. 묘소는 부인 영일정 씨의 묘와 쌍분으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신도비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나 탁본 등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비문의 내용을 판독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신도비문은 1634년(인조 12) 이준(李埈)이 짓고, 허목(許穆)이 글씨를 썼다. 이원익이 이준에게 행장을 맡기면 가감 없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할 사람이라고 했을만큼 신뢰한 인물이다. 허목은 이원익의 손녀사위로 (오리집)을 정리하는 등 이원익가의 일을 담당하였다. 비 높이는 185㎝, 폭은 90㎝, 두께는 2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