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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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1547~1634)
가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시기를 대표하는 경세가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성부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에서 태어났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益寧君 치)의 4세손으로,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성품
키가 작아 키 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수학과 출사
15세에 동학(東學: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하여 1564년(명종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성절사의 질정관 및 황해도 도사
정자 · 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 · 예조 · 형조의 좌랑을 거쳐 그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 · 헌납 · 장령 · 수찬 · 교리 · 경연강독관 · 응교 ·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5년간 파직된 사연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왕자사부 하락(河洛)으로부터 승정원이 탄핵을 받은 바 있었는데,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를 면하려 하였으나, 그는 다른 승지와는 달리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하여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안주목사로서 활약상
그 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그는 양곡 1만 여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안주지방에는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는데, 그가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평안도 도순찰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하였으나 평양이 위태롭게 되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때 겨우 3, 000여명으로 평양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 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함으로써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진주변무사 이원익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 가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지만,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당쟁의 비판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하여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모두 내몰림을 당하자 이를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이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하였고, 또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호성공신과 완평부원군
1600년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대동법 시행
광해군 즉위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하여 실시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대비폐위의 반대와 홍천유배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가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 등에 의하여 대비폐위론이 나오자, 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문을 초하여,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驪州)로 이배되었다.
인조반정과 광해군 구원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에 호종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서울로 환도하여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 그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소박과 청빈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저술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